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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견시점

단어를 독점한 자들: 어버이와 엄마들

근대 이전의 중국 문화권에는 피휘(避諱) 문화가 있었다. 왕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규칙이다. 그런데 왕의 이름에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한자가 들어가면 백성들은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기 어려울 지경이 된다. 그래서 묘호는 일부러 흔하지 않은 한자를 사용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기까지 했다. 꽉 막힌 유교문화였지만 나름대로 유연성을 발휘했던 셈이다.

태양과 태양 사이

그런데 대통령의 이름도 거리낌 없이 부르는 현대에는 엉뚱한 어려움이 생겼다. 예명을 일반명사로 정한 가수가 유명해지면, 인터넷 검색 결과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현상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이돌 그룹 <빅뱅>의 <태양>이다. 물론 검색 연산자 조건을 사용하면 나름대로 정보를 추려낼 수는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빅뱅과 태양은 꽤나 연관성이 있는 단어다. 그래서 한국어 사용자들이 우주 태초의 빅뱅에서 태양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가수들은 예명을 만들 때 제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줬으면 한다. 소금에 설탕을 섞는 것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니까. 대소문자와 숫자와 특수문자를 섞어 10자 이상으로 힘들게 만들라는 주문까지는 안 하겠다. Ke$ha라는 아주 좋은 모범이 있다. 그녀에게 달러가 함께하기를.

그녀에게 달러가 함께하기를.

여기까지는 악의가 없는 충돌이었다. 길 가다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당혹감 정도다.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정치사회단체의 명사 독점이다. ‘어버이’연합, ‘엄마’부대는 물론이고, ‘민주’, ‘통일’, ‘참’, ‘착한’ 등의 일반적이면서도 알맹이가 없는 단어를 핵심으로 내세운 모든 단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단어를 독점한 자들

그다지 차별화되지 않는 데다가 새로운 정보가 들어 있지 않은 단어를 강조하는 이름에는 분명히 (지저분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평생 ‘어버이’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엄마’가 없는 가정이, 자칭 ‘참’되고 ‘민주’적이지 않은 단체가 얼마나 되겠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단어를 소규모 집단이 마음대로 독점해 버렸다.

엄마부대의 정대협 앞 한일협상 수용 요구 시위
출처: 오마이뉴스 ⓒ 박훈규

네이밍이 순수하지 않다. 단순하게 구성원들의 특징을 표현하는 중립적인 선언이 아니라 집단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를 은근히 매도하는 더티 플레이에 가깝다. 속성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입하지 않은 ‘어버이’나 ‘청년’, ‘엄마’, ‘애국’등의 단어에는 정당성이 없다. 네이버에 사용자 모임을 찾아보면 ‘공식’이 아닌 인터넷 카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삼성이 <갤럭시노트 공식 사용자 모임>을 만들었겠는가? 어떤 차량 용품 쇼핑몰이 무슨 자격으로 <현대차 공식 사용자 모임>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무리하게 그런 대표를 자처하는 이유는 모두가 안다. 사용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업체의 장사를 위해서다. 사용자야 ‘공식’ 인정을 받는 말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모여야 돈이 되는 인터넷 카페 주인장의 속내는 다르다. 그래서 ‘공식’이 되려는 컴플렉스가 있다. 그런데 공식이 아니기에 추해진다.

내가 너희의 ‘어버이’라니까? 그러니 자식들아 부모의 말에 감히 토 달지 말지어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청년’입니다! 우리의 말에 동감하지 않는 자는 시대에 뒤쳐진 노인네들입니다. 우리는 ‘엄마’입니다! 그러니 내 딸이 피해자라도 용서할 거니까 할 말 없지? 우리는 ‘애국’시민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매국 빨갱이인거 다들 아시죠? 우리는 ‘진보’입니다. 즉 저들은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 꼴통입니다.

누구나 순수하게 쓸 수 있는 단어를 음흉한 속내로 더럽히는 자격 없는 자들. 누구도 뽑은 적 없지만 어느새 ‘청년’이며 ‘민주시민’이며 ‘애국자’인 나의 대표가 되어버린 이들. 광고 블로그들이 검색 순위를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하듯이, 아무거나 하나 걸리란 식으로 온갖 단어들을 죽 늘어놓지 말라. ‘어버이’, ‘엄마’, ‘청년’, ‘새’, ‘참’, ‘민주’, ‘국민’, ‘평화’, ‘참여’, ‘애국’… 정말 좋은 단어들이다. 어떤 의미도 담지 않은 미사여구에 불과한 ‘좋은’ 단어들. 왜 난 듣기만 해도 신물이 날까.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만 같다.

원문: John Lee의 페이스북

단어를 독점한 자들: 어버이와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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